안수호 연민 동정 공감 호기심 배덕감 애정······ 이 세상에 차고 넘치는 무형의 것들을 한데 모으면 네가 될 것 같다. 소년은 그저 조용히 손을 뻗곤 했다. 밤길 의지할 데라곤 골목길 흐린 불빛밖에 없는 그 애에게. 마치 수호천사처럼.

천사랑 제 세상에 볕이 드는 건 아주 먼 이야기일 거라 예감했다. 그런데 넌 뭐라고 자꾸 손을 내밀어. 이 세상은 저 홀로 두 발 딛고 서기도 힘든데 왜 자꾸 손을 붙잡아 함께 서게 하는지 모르겠다. 제 별에 불시착한 소년에게.

― 우린 무슨 사이야?
― 몰라. 보고 싶다. 어디야.

少年―自立의 기록 벽산고의 잠자는 수호천사. 소년이 주먹을 드는 까닭은 지키고자 하는 선이 있기 때문에. 바깥 일로 바쁜 부모 탓에 거의 할머니 손에 자랐다. 결핍의 기억은 자연히 소년을 어른스럽게 만들었고, 하루하루 쌓여가는 삶이란 버팀과 자립의 연속이었다. 가진 것보단 포기하는 것이 더 많은 부조리한 삶이나, 소년은 그에 굴하지 않고 해야 하는 일을 찾는다. 이런 지난한 과거는 겹겹이 쌓여 지금의 안수호를 만들었다.

少女―孤立의 기록 사람은 이름따라 산다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이라는 이름을 얻은 소녀는 사랑 따위와 거리가 먼 유년기를 보냈다. 아버지란 사람은 소녀가 초등학교를 입학하기도 전에 외간 여자와 바람이 나 집을 나갔고, 홀로 딸아이를 감당해야 하는 어머니는 일 때문에 자연히 석 달에 한번 얼굴을 비칠까 말까. 그나마 믿을 만한 건 또래보다 조금 명석한 두뇌였으나 어김없이 그놈의 돈이 발목을 잡았다. 유명 강사 커리는 어떻게 타? 내가 아는 커리는 3분 카레밖에 없어 이 미친······ 고립된 삶은 그렇게 소녀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제 너를 몰랐던 때로는 못 돌아가

밤은 길어 걸어 자정에 가까운 밤. 배달 알바를 뛰던 안수호는 골목길에서 웬 양아치들에게 둘러싸인 천사랑을 구해주게 된다. 나? 뭐··· 올빼미들에게 치킨 배달 중인··· 수호천사? 그러나 도움을 받은 천사랑은 소란 중에 아무 일 없었다는 양 홀연히 사라져버린다.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훌쩍 떠나버리는 행색을 보아하니 저 싸가지와는 다시 엮일 일이 없겠구나 싶었는데 이게 웬걸. 안수호는 대낮의 서점에서 문제집을 훔치다 들킨 천사랑과 재회한다.

여름은 소리소문 없이 명찰에 적힌 이름-천사랑-을 보고 처세술을 부린 안수호가 또 한번 천사랑을 위기에서 구해준다. 그러나 이번에 돌아오는 것은 당황한 천사랑의 욕설. 천사랑은 그렇게 안수호를 피해 도망치듯 자리를 뜬다. 최악에 최악을 더하면 여기서 뭐가 더 나오나. 안수호는 문제집을 사느라 쓴 돈을 버린 셈 치기로 하나, 며칠 뒤 늦은 밤 골목길에서 저를 기다리던 천사랑과 마주친다. ······라면 먹고 가. 그렇게 천사랑과 함께 편의점 의자에 앉아 라면을 동반한 기이한 시간을 보낼 무렵, 안수호가 던진 농담에 상처받은 천사랑이 돈을 돌려주곤 편의점을 떠난다. 그 소도둑이 안 되려고 이러는 거야. ······괜히 돈 쓰게 한 건 미안.

불시착한 이방인은 저를 수호천사라 소개했고

안녕 수호천사 한밤중 편의점에서 나눈 단편적인 대화만으로도 천사랑의 사정을 파악한 안수호는 돌려받은 돈에 괜히 마음이 쓰인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로 연시은에게 중고 문제집을 받게 되고, 안수호는 몇날며칠 잠을 줄여가며 문제집의 풀이와 답을 모조리 지우기 시작한다. 안수호가 문제집을 깨끗이 지운 며칠 뒤, 천사랑은 일전의 편의점에서 저를 기다리던 안수호와 마주친다. 너 나 피해 다니냐? 밤에 혼자 돌아다니는 건 뭐 여전하시고. 일련의 실랑이 끝에 안수호가 공 들인 문제집을 선물 받은 천사랑은 지우개로 일일이 지운 듯한 문제집 상태에 당혹감을 금치 못한다. 너덜한 문제집을 한장한장 넘기며 안수호의 지난날을 가늠해보던 천사랑은 울렁거림을 느끼게 되는데. 그날을 기점으로 두 사람의 일상은 겹쳐 간다.

그럼 너는 누가 구해줘? 늦은 밤 우연한 만남인 척 손을 흔드는 태연함, 밥 먹었느냐며 저를 붙잡아 데려간 오래된 분식집, 그 누구도 부를 일 없는 천사랑 이름 석 자 큰소리로 외치는 소년이 어느덧 천사랑에게 초여름의 단편이 되었다. 그 배려에 탄복하기라도 했나, 다가오는 안수호의 생일을 위해 선물을 준비한 천사랑은 그만 타이밍을 놓치고 다음을 기약하게 된다. 그리고 여름이 가까운 어느날, 안수호가 쓰러졌다.

제 사랑을 여름에 두고 왔어요

처음부터 만나지 말걸 그랬어 안수호가 기약 없는 혼수상태에 빠진 뒤, 천사랑의 삶은 다시금 그를 만나기 전으로 돌아간다. 이 다난하고 부조리한 세계에서 천사랑 이름 석 자 증명해내는 방법이라곤 억척스럽게 숫자 하나에 얽매이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고등학교 2학년 첫 시험에서 전교 석차 1등이라는 쾌거를 이루지만, 천사랑은 기이하게도 채울 수 없는 공허함을 느낀다.

지독히 다정한 배신자 시간이 흐를수록 삶의 의미를 잃어가는 기분에 휩싸이던 천사랑은 결국 그간 회피하기 급급했던 일에 한 발자국 나아간다. 안수호의 병실 앞에서 문을 열기를 주저하다 돌아가길 몇 번. 어느 날, 천사랑은 안수호의 병실을 찾은 연시은과 조우하게 된다. 아, 문제집에 적혀 있던 그 이름이다. 초면인 두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어렵지 않게 대화를 이어나간다. 안수호라는 공통점 하나만으로.

보고 싶다는 말을 먼저 배운 어린아이처럼

추신 나도 네 꿈을 꿔 만개하는 봄, 모의고사를 풀던 천사랑이 깜빡 잠에 든다. 안수호를 마주한 천사랑은 제 눈앞에 드리운 상황이 현실이 아닌 꿈임을 금세 자각한다. 기약 없는 기다림에 지친 천사랑이 영영 깨어나지 않을 듯한 안수호에게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고. 왜 내 꿈에 나온 건데. 시간 많아? 얼른 일어나기나 해.* 그러나 추억으로 얼룩진 장소와 여느 때처럼 저를 대하는 안수호로 인해 결국 천사랑은 오래 덮어두었던 마음을 받아들이기에 이른다. 안수호, 날 도와줘서 고마워.* 다시 현실―꿈결에서 깨어난 천사랑 앞으로 전화 한 통이 걸려온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소제님

― 사랑씨, 어디야. 보고 싶은데.

역시 넌 네 이름이랑 잘 어울려.